저는 2003년 5월 15일 홈플러스 둔산점에 입사한 장미영입니다. 계산대에서만 햇수로 19년 일을 했습니다.
아가씨 때는 서울에 있는 전산 회사에서 8년 동안 생산관리 주임으로 근무했어요. 결혼하며 일을 관두고 아이를 키우면서 생활 형편이 안 좋아져서 홈플러스에 입사하게 됐죠. 그 직전엔 제과 공장에 15일 정도 다녔는데, 아이가 두 명이 있는 상태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3교대로 육체노동을 처음 하다 보니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진짜 지옥같이 힘들더라고요. 거기는 너무나 열악했어요. 밥은 잘 나오던데, 첫날 퇴근해서 집에 왔더니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요. 원래 했던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은데, 저같이 생산직을 안 해봤던 사람들은 더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하고 서서 해야 하는 박스 작업부터 시작해서, 반복되는 육체노동… 똑같은 작업을 계속 반복하는 게 너무 지옥 같았죠.
그렇게 일을 못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홈플러스에서 합격했다고 연락이 와서… 여기는 계산을 하는 데니까 부서 자체가 제과 공장보다는 쉬울 거라고 생각을 하고 대번에 관두고 들어왔죠. 합격했다고 해봤자 아르바이트로 들어온 거죠.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게 지금까지 일하게 됐는데, 제과 공장보단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던 홈플러스죠. 일 처음 시작했을 때 의자가 없었는데 그때부터 십몇 년 동안 의자 없이 일했어요.
‘계산하는 데니까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마트에서 실제로 일하는 건 어떠셨나요.
처음 들어갔을 때는 아침 아홉 시에 출근을 하면 저녁 아홉 시에 끝났어요. 열두 시간을 그렇게 일했죠. 중간에 밥 먹는 시간 같은 기준은 있었어요. 세 시간에 한 번씩 30분 쉬는 기준은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손님이 너무너무 많았잖아요. 빼도 빼도 손님이 계속 와서, 저만큼 일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깨 근육이 남아있는 사람이 없어요. 대부분 어깨 질환, 그다음에 손목 터널 증후군이 있어요. 손가락으로 계속 자판을 두들겨야 하잖아요. 그리고 홈플러스 와보면 아시겠지만 패밀리 카드 번호 누르라고 하잖아요. 그걸 손님들 본인이 하는 걸 싫어해요. ‘네가 해야지, 왜 내가 해?’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지금은 많이 고쳐졌지만… 저뿐만 아니라 가공 쪽에서 일하는 사람은 허리, 다리, 남아나는 사람이 없어요. 5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퇴직에 가까워가고 있는데 퇴직금을 전부 다 병원비로 써야 하는 상황이에요.
노조가 있는 곳하고 없는 곳하고 다른 게, 노조 없는 곳은 의자가 있어도 서서 일하는 데가 있어요. 옛날 계산대는 하부장이 다리를 넣을 수 있는 데가 막혀있어서 일을 앉아서 못해요. 그래서 그걸 개선해달라고 얘기하는데도 불구하고 회사는 비용 문제 때문에 그걸 해줄 수 없다고 얘기해요. 계산대 하나 바꾸려면 천만 원 이상 들어간다면서, 옛날 걸 고집하는 데가 많은 거죠.
제가 있던 둔산점은 예전엔 손님이 많고 가장 중심부에 있는 데다 보니까, 2014년에 계산대를 싹 갈아줬어요. 의자가 생기면서 손님이 없을 땐 앉고, 엉덩이 붙일 때쯤 되면 손님이 와서 다시 일어나게 되잖아요. 근데 이게 너무 힘든 거예요.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데 무릎에 더 무리가 가는 거예요. 노조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을 땐 손님 오면 서서 일하는 게 당연한 건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조 사람들이 와서 보더니 ‘왜 계속 일어나서 일하세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앉아서 일해요? 손님이 왕인데’ 하니까 웃더니 노조를 만드세요, 하더라고요. 노조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서는, 다른 점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정보를 알게 된 거예요. 다른 데는 다 앉아서 하더라. 너네만 여지까지 멍청하게 서서 일했니. 다 앉아서 일하는 거야, 노조가 있는 데는. 노조 없는 데는 윗사람들 눈치 보다 보니 다 서서 일한 거지. 노조가 생기면서 2018년도부터 쭉 앉아서 (바코드를) 찍을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적으로 하다가, 제가 노조를 같이 결성하고 간부가 되면서 회사 점장한테 ‘우리 내일부터 앉아서 한다’ 이렇게 통보를 한 거죠. 자기네들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그래서 노조가 중요한 거예요.
우리도 공부하면서 알았지만, 어릴 때부터 유럽은 협상하는 걸 배우고, 일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에 참여해 단체교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안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아이 때부터 배우고 큰다고 하더라고요. 유럽 노조 가입률도 80%래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노조 가입률이 12%밖에 안 돼요. ‘노조는 빨갱이’ 아니면 ‘귀족 노조’라는 이상한 프레임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처럼 맨날 밥하다가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빨갱이일 리가 없잖아요. 홈플러스나 롯데마트나, 우리 다 최저임금 받고 일해요. 심지어 시급 자체는 최저임금보다 적게 매겨두고, 다른 보조금을 넣어서 총액만 최저시급에 맞춰주는 꼼수를 부려요. 기본급이 올라가면 상여금도 올라가게 되거든요. 아직도 언론에서나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보고 귀족 노조라고 하고 빨갱이라고 하는 걸 들으면 억울하죠. 어제도 서울 노동자대회에 나가서 시위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욕을 하더라고요. 우리는 그저 우리 온전한 시급 달라고 나온 사람들이죠.
전 15년 정도를 서서 일했어요. 이러다 보니까 하지정맥류 앓는 분들도 굉장히 많아요. 지금 천안지회장님이 하지정맥류로 병가 신청을 하셔서 들어가셨고, 우리 지점에도 입원했던 분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그게 싸우기 전에는 병가로 인정이 안 돼요. 꼭 싸워야지만 돼요. 우리가 하지정맥류 걸려서 3일 만에 퇴원하면 바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어떤 협박을 해야 하냐면, ‘나와서 일하다가 하지정맥류로 터지면 너네가 책임져라’ 그래야 병가를 제대로 줘요. 그전까지는 회사에 그런 병가 코드가 없어, 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요. 계룡지회장님의 말에 따르면, 조합원 중 하나가 하지정맥류 때문에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회사에서 퇴원 후에 바로 출근하라는 식으로 나왔대요. 지회장님이 ‘우리 그러면 내일 기자님들 다 모시고 인터뷰 한 번 할게. 여기 기자도 부르고 저기 기자도 부르고, 계룡점 앞에 쫙 모시고 인터뷰 한번 할게’ 했더니 이제 그래그래, 병가 내줄게, 하더래요. 계룡지회장님이 워낙 강한 편이시고 부당함에 대해 얘기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 다른 지점에서는 수술하고 난 다음에 내일 출근하세요, 하면 힘없는 데는 그냥 나오는 거예요. 아까 병가 인정을 받았다고 했던 천안지회장님도 처음에 신청했을 때는 입원한 기간만 처리가 되고 그 이후에 회복 기간 없이 바로 출근해야 한다고 얘기했대요. 그때 항의를 하고 나서야 병가를 받아주게 된 케이스고요. 대부분이 병가를 못 받아요.
근무하시던 점포에서 제일 먼저 노조에 가입하셨고 나중에 간부가 되셨다고요.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화장실에 가고 싶잖아요. 발령받은 지 한 달 정도 된 모 주임이 카톡방에 장문의 글을 올린 거예요. ‘둔산점은 왜 이렇게 화장실을 자주 가냐. 가오점에서는 근무 중에 화장실 가는 사람 이틀에 한 번 봤는데 왜 여기는 수시로 가냐?’ 저도 사실은 화장실 잘 안 가는 타입이라, 처음엔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왜 저렇게 자주 가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 방광이 약한 거였어요. 우리 언니들 중에 한 시간에 한 번씩 꼭 가야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러는데, 미안해하면서 갔다 오세요. 손님이 많을 때는 눈치 보이니까 못 가요. 꼭 참는 거야. 그러다가 손님이 뜸해졌을 때 동료가 책임져줄 때 갔다 오는 거였어요.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주임한테는 눈엣가시였던 거죠. 그 사람이 10분을 늦겠어요, 20분을 늦겠어요? 1, 2분 정도면 갔다 오는데도 눈엣가시였던 거예요. 화장실 가려면 허락 맡고 가라, 이렇게 된 거죠.
화장실 자주 갔던 언니들 중에 두 명이 저한테 밥을 사주겠다고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언니들이 자기들은 화장실 못 가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 그래서 그러면 지금 빨리 노조에 가입하라고 가입서를 줬죠. 두 명이 쓴 거예요. 가입서를 받은 그 날, 회사에 말했어요. 그때 카톡 내용을 보여주면서 이건 생리적인 현상인데 어떻게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냐, 사람이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쉬는 시간도 있고 일도 하는 거지 관리자가 화장실 가지 말라고 한다고 참아지는 거냐, 통보하면 되는 거지 허락받아야 하는 거 아니다 하면서 갑질 관리자에 대해 말했더니 해결된 거죠. 그런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노조 존재 이유에 공감하고 가입하게 됐어요.
홈플러스 둔산점이 폐점하는 과정에서 회사와 노동자 간 이슈가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요.
노조로 인해서 업무 환경이 변화되고 조금은 개선이 됐지만, 그럼에도 회사의 문제가 많이 있어요. 홈플러스 둔산점은 12월 28일에 폐점합니다. 작년 6월부터 회사가 자산 유동화라는 명목으로 안산점, 둔산점을 팔겠다고 거의 일방적으로 말했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6개월 싸우고 올해 초에 극적으로 타협을 봤어요. 올해 폐점한 이후 지망을 받아서 타 지점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회사에서 내주는 조건으로 집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라는 조건이었어요. 대부분이 집에 갈 사람, 그다음에 멀더라도 다른 지점으로 갈 사람 윤곽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에요.
저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요. 일하다 보면 너무 아프고 2, 3일 연속 근무하게 되면 어깨가 욱신욱신 쑤셔요.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조 간부다 보니 제가 그만두게 되면 대전·세종·충청에서 저를 보고 가입했던 사람들이 다 관둬야 하는 거 아닌지 생각하게 될까 봐 못 그만두는 거예요. 제가 투쟁하며 보여줬던 인상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도 많고, 저 때문에 노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꽤 있거든요. 장미영이 그만둔다, 우리 다 그만둬야 하지 않겠냐 그렇게 될까 봐 저도 세종으로 가기로 했죠. 문제가 뭐냐 하면 제가 지금 읍내동에 살거든요. 원래 근무하던 둔산점까지는 3–4킬로미터 정도 거리인데, 제가 가려고 하는 세종점까지는 25킬로미터예요.
회사가 이 지점 하나만 팔고 나면 괜찮겠지만, 또 동대전점도 팔렸잖아요. 거긴 내년 8월에 문을 닫아요. 탄방점, 둔산점, 동대전점까지 세 지점을 팔았고, 더 팔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열악한 일자리에서 여성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폐점되는 문제가 지금 가장 힘든 상황이지. 일자리를 잃거나, 근무지가 너무 멀어져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홈플러스 전체를 보자면,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가 인수하면서 약 9천 명의 감원이 일어났어요.
2018년도 노사 합의에 따라서, 그전까지는 무기계약직이었다가 정규직화가 됐어요. 그런데 정규직이 되면서, 그다음부터 인원을 안 받아요. 뽑지를 않아요. 가공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우리 회사 잘 나갔을 당시에는 부서에 남자들이 두세 명씩 있었어요. 무거운 거 들어다 주는 남자 직원들이 정규직으로 일했었어요. 근데 워낙 급여가 적고 고된 일이니까 나가떨어진 거예요. 다른 일자리를 알아본 거죠, 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다 보니 아줌마들이 모든 일을 담당하게 된 거예요. 고추장 몇십 킬로그램 되는 거, 음료, 어마어마하게 들어오는 휴지… 샴푸 이런 것도 하나에 800그램씩 되는데, 그게 박스로 들어오면 거의 5킬로그램 다 돼요. 그런 무거운 걸 갖다가 자기 키보다 훨씬 높게 쌓아놓고요. 후방에서는 물류 차가 들어와서 물품을 엘리베이터에 실어주면 가공 사람들이 자기 카테고리에 있는 물건을 실어서 자기 키보다 너무너무 높게 위험하게 그렇게 쌓아가지고 밖으로 끌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또 다 진열을 해요. 예전에 정규직이 했던 일을 이 사람들이 다 몰아서 하게 된 거예요.
원플러스원 가격표 그런 것들도 다 우리 직원들이 일일이 다 관리해야 해요. 옛날에는 스무 명이 했던 일을 다섯 명이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 중에 휴무가 생기고 그러면 아침에 한 명 저녁에 한 명이 그 모든 일을 담당하는 거예요, 충원을 해주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해내요, 이 언니들이. 가격 변동이 일어나면 다 전산 작업하고 다 출력을 해요. 근데 아줌마들이 눈이 안 보이잖아요. 아무리 쳐다봐도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러다 보니 바코드에 찍히는 가격이 가격표하고 달라서 계산 착오가 나는 경우가 생겨요. 손님들이 나는 분명 5000원으로 봤는데 이거 왜 7500원 찍혀요, 그러는 거죠. 그 차액에 대해서 문화상품권이 나가요. 그러면 고스란히 핀잔이랑 한 소리 듣는 거죠. 고가 평가에도 들어가고요. 그런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 일을 다 할 수 있어요. 한 사람이 전부 가격표 작업도 해야 하는데 물류는 들어와서 쌓여, 그러면 진열대는 텅텅 비니까 또 점장이 무전으로 어디가 고추장이 빠졌어요, 하면 그거 갖다가 막 채우고…….
그거 말고도 힘들었던 일은 많죠. 한참 자식뻘인 아이들한테 당했던 갑질 이겨내면서 했는데, 그것만 있겠어요? 심한 욕설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잘못해놓고 평생 계산이나 하면서 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하루는 계산하면서 손님에게 제가 ‘패밀리 카드 없으세요?’ 물어봤더니, ‘있으세요? 라고 물어봐야지. 싸가지 없게’ 그래요. 카드를 보니까 대학교수더라고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었어요. 한 손님은 계산하고 나가실 때 가방이 너무나 두꺼운 거예요, 아무리 봐도. 물건 딱 하나만 사시길래, 죄송하지만 다른 거 더 계산할 거 없냐고 물어봤더니 도둑 취급했다고 남편까지 전화 하고…….
그리고 조합원한테는 더 힘든 일을 맡기는 상황도 있어요. 자기네들 괴롭혔던 게 얄미운 거예요. 좋은 부서, 보안이나 서비스센터나 그런 데는 비조합원부터 먼저 보내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조합원들은 갈 자리가 가공밖에 없는 거예요. 조금 더 편한 데로 가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서는 자리가 없다면서 기다려보라고 해요. 저도 온라인 배송하는 부서 신청했는데 엉뚱하게 서비스센터에 있던 사람이 먼저 갔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는 거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우리는 이 회사를 다니고 싶었다는 거죠, 회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너무 고단하고 힘든 일이었고, 사람도 충원해 주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이 언니들은 퇴사할 생각을 안 하고 꿋꿋하게 다녔을 거예요. 더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나갈 곳이 있고 국민연금 넣어주는 회사가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는 거죠. 생계가 달려있으니까. 다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이에 회사는 어떻게든 덩치 작게 해서 팔아먹으려고 해요. 홈플러스랑 다르게 롯데마트는 희망퇴직을 받으면서 조건을 많이 걸었어요. 위로금을 준다든지, 최대 27개월치 월급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여자가 생계를 책임지는데도 가장으로 보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는 가장으로 안 보잖아요. 해고도 쉽게 생각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자가 일을 하면, 남자가 벌어다 주는데 학원비 보태는 정도, 살림에 보태는 정도로 생각해요.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운 대상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 속내를 들어보니 제 주위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이었어요. 자기 남편이 선생님이다, 공무원이다, 가게를 한다, 이러니까 제가 뒤에서 그 언니들이 얼마나 부러웠겠어요. 나는 가장으로 일해서 이거 가지고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 형편이 얼마나 낙담되고 한심스럽겠냐고요. 그랬는데 알고 보니 다 개인적으로 사정이 있었고, 울면서 일했죠, 다. 제가 번 돈으로 네 식구를 먹여 살렸어요. 그 돈으로 빚 안 지고, 먹고살기만 한 거죠.
저 어렸을 때 당시에는 지역마다 중학교에서 1, 2등 하는 사람들이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에 갔어요. 형편이 못돼서 대학을 못 갔던 사람들이에요. 여기에 그 상고 갔던 여자들이 대부분이에요. 지금으로 치면 서울로 대학 가는 아이들인 거죠. 증권 회사나 은행에 다녔거나 했는데 경력이 단절돼서 들어온 경우가 많아요. 다니던 회사 다시 들어갈 수 없으니. 저도 젊었을 때 서울에서 그냥 쭉 다녔으면, 결혼 안 했으면 대리 과장 달았을 텐데요.
노조에서 활동하신 얘기를 들으니 드리고 싶은 질문인데, 어릴 때부터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셨나요?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기는 했어요. 저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날 누가 막 막고 있으면 바로 뜯어말리든지 신고를 하든지 그런 성격인데. 나와 같은 성격의 사람이 별로 없구나, 나중에 알았어요.
저는 ‘너는 어떻게 저걸 보고 그냥 지나가니?’ 늘 이랬어요. 동료가 앞에서 당하고 있으면 저는 그거를 해결해 주려고 하고… 성격이 그래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인 건 맞아요. 못 참는 성격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