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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충분히
있거든요.
영어학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성희 님의 이야기
학원의 빈 강의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이성희예요. 이룰 ‘성(成)’에 빛날 ‘희(熹)’를 써요. 제 나이 때에는 여자 이름 ‘희’ 자에 계집 ‘희(姬)’를 많이 썼어요. 크게 선심 쓰면 기쁠 ‘희(喜)’. 전 빛날 ‘희’라 좋았어요. 25년 정도 입시 관련 사교육 현장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원에 고용된 근로자로 15년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10년째 개인 학원을 차리고 운영하고 있어요. 20년 넘게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늘 하는 일이 비슷하고 생활 패턴이 뻔할 것 같죠? 꼭 그렇진 않아요.
지금의 일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교육받았던 환경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들어가면 빨리 취직해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으니 다들 실업계에 진학하는 추세였어요. 저도 비슷한 이유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했고 졸업하자마자 제약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대학에 너무 가고 싶었어요.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반수를 해서 종합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어요. 저는 사실 글 쓰는 일을 재밌어했는데, 영문과는 현실과 이상의 절충안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영문과는 최고 인기 학과였고, 영문과를 진학하면 안정된 직장도 얻고 문학을 배우니 글을 쓰고 토론할 기회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가정에서의 지원은요?
집에서 제가 하려는 일을 밀어주고 싶어 한 사람은 엄마였어요. 내가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조금만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자 없는 형편 쥐어짜서 대학을 보내줬죠. 나는 기본적으로 여자들이 변화를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요. 아들에게 기회를 몰아주는 게 너무 당연했던 당시에도 오빠들보다 나를 더 밀어줬던 것 같아, 우리 엄마는. 멋진 분이에요. 내 전신이 어디에서 왔겠어.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더 들려주세요.
대학교에 다니면서 개인 레슨으로 친구 조카를 가르치게 됐는데, (사실 많은 영문과 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 못했지만 가르치는 일이나 누군가에게 개념을 설명하는 일은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오~” 한다거나 누군가 나의 잘난 척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걸 보고 이런 일을 해도 되겠다 싶었죠. (웃음) 아이들이랑 합도 좋았어요.

결혼하고 나서 1년 정도 분식집 사업을 했던 적도 있어요. 장사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해두었던 돈을 모두 날려 먹고 망했죠.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학교 앞 음식점이라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그때에도 학생들에게 사장님이라는 말보다는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결혼 후 아이 둘을 낳고 나서는 육아가 버거워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닐 즈음 어느 날 남편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어요. 애들이 얼추 컸으니까 애 아빠 혼자 벌어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그 전화를 받자마자 문구점에 가서 이력서 용지를 샀고, 그렇게 학원 일을 시작하게 됐죠.
학원 강의실의 교탁
일하면서 느낀 어려움이 있나요?
아마 제 나이 서른 초반이었을 거예요. H 모 학원에서 시급 8500원을 받고 방문 학습지 교사를 하다가, 영어 강사 일을 하던 원장 아내가 만삭이 되어서 저에게 원내 영어 강사 일을 제안했어요.

그 학원에서는 수시로 강사를 모집했는데, 나이 마흔이 넘은 여성 지원자는 무조건 컷이었어요. 면접 기회도 없었죠. 학원가에서 마흔이 넘은 여자는 환갑이라고 불렀어요. 물론 남자 강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고요. 저도 그때는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 못했어요. 나이 마흔은 그간 쌓아왔던 모든 경력이 발현되는 시기인데, 본인 의지나 능력과는 상관없는 부당한 기준이죠. 연차가 쌓이면 그 경력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이상한 이유로 선호하지 않는 거예요. 대입 시험 반처럼 차라리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그룹에서는 좀 덜했고, 초·중등 저학년 대상의 그룹에서는 더 노골적이었죠.

학원가에 ‘여자 강사는 젊어야 한다’, ‘젊어야 트렌드를 읽는다’는 통념이 있어요. 저도 지금은 고용된 강사로 일할 수 없는 나이죠. 많이 바뀌었다 해도 쉰이 넘은 여자 선생님은, 특히나 영어 선생님은 드물 거예요. 본인 사업을 스스로 꾸리지 않는 한.

H 학원의 동료 선생님 중에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는 여자 선생님이 있어요. 수학 선생님인데, 그분도 어릴 때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워낙 똘똘해서 얘는 무조건 대학을 보내야 한다 했대요.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대학을 나왔는데 이 정도 나이가 되어서는 취직할 곳이 없는 거예요. 경력을 살릴 곳이 없는 거야. 최근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가 한 달 만에 허리를 다쳐 나왔어요.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충분히 잘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전문 인력이 성별과 나이 때문에 커리어가 막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이제 내 나이쯤 되면 학생들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학생을 만나봤겠어요.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가 잘 된다고.
사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일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같은 교육 일을 하더라도 입시 학원 일은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어요. 사회에서도 사교육은 필요악이라고 부르잖아요. 학원은 교육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교육보다 불건전한 것이라거나 아래 위계에 놓인 직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종종 아이들이 던지는 말에서도 그런 태도를 읽어요. 학원은 그냥 돈을 내고 다니는 곳이라는.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고 상점을 선택하듯 대하는 거죠. “학교 선생님도 안 그러는데 학원 선생이 뭔데 그래요?” 라거나 “~하면 끊을 거예요. 안 다닐 거예요.”라는 말을 하기도 해요. 학원을 두고 “돈 아깝다”라는 말도 흔히, 공공연하게 하잖아요. 열심히 커리어를 쌓고, 공부하고 지식을 잘 전달하기 위해 연구한 사람이라도 이런 말 앞에서는 의기소침해지죠.

학원비가 얼마인데 결석을 하느냐고 계산을 가르치는 학부모나 내가 얼마를 지불하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셈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고 무력한 기분이 들어요.
학원 강의실 내부 교사 자리
근무환경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학원은 모든 육체적 신체적 고통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노동이에요. 요즘은 노동법이 개정되어서 학원 선생님 처우가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학원에 고용된 강사들은 1년에 적어도 네 달(시험 대비 기간) 토요일 일요일 없이 늦은 시간까지 서서 일해야 했거든요. 너무 당연했죠. 계약서에는 ‘이 모든 수당이 고려된 연봉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써놓으면 그만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취직이 안 되는 거예요.

게다가 원생 한 명이 그만둔다고 하면 그 학생을 가르친 모든 강사가 원장실에 소환되었어요. 학부모가 전화라도 하는 날엔 말할 것도 없죠.

오랜 시간 서서 근무하기 때문에 무릎과 허리 망가지는 일은 기본이고, 빈번한 성대결절, 식사를 제때 할 수 없어서 속병도 많이 앓아요. 저는 학원에 고용되어 일할 때 관절염, 허리 디스크(큰 수술도 한번 했고), 하지정맥류를 앓았는데 뭐 사실… 이것만 있었겠어요.
일과 관련된 최근 고민이 있나요?
돈벌이가 아니라 돈을 쓰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그런 열정을 줄여나가게 될까 두려워요. 이제 내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나랑 뜻을 맞춰 줄 동료가 있을까?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저는 내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글을 써서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일, 연극을 기획하고 무대에 서서 관객들과 호흡하는 일, 사람들을 모아서 영상을 만드는 일. 죽기 전에는 할 수 있겠죠.
현재 상황과 상관없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