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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장미영 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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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 운영, 청소 노동, 요양보호사 일을 경험한
최남희(가명) 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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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노동운동가로
개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고 있는
민경임 님의 이야기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대전지부 수석부지부장 민경임 님의 명찰, 조끼, 뱃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학교 급식실에서 20년째 근무하고 있는 민경임입니다. 서른여덟에 입사해서 지금은 쉰여덟이 되었네요. 노동조합에서는 수석부지부장의 역할을 맡고 있어요.
현재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해요.
그전에는 아동복 가게를 했었어요. 일이 잘 안되어서 장사는 내 것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일을 접었고 그러다 보험회사에 입사하게 됐어요. 저는 다른 사람에게 보험 설명은 잘했는데, 그걸 영업실적으로 연결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교육 성적은 좋았어요. 설명도 잘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가입하세요’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이것도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다가 주부들 직업을 찾아주는 취업 관련 지원 프로그램이 있어서 한식 요리를 배웠어요. 자격증을 11월에 따고 다음 해 1월에 아이 학교로 이력서랑 자격증을 들고 찾아가서 ‘사람 필요하시면 쓰세요’ 했어요. 그런 당당함은 있었어요. 그리고 1월 말에 연락이 왔죠.

그때부터 그 학교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3월에 정식으로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용역이었어요. 월급이 많을 때는 40만 원, 적을 때는 36만 원 이렇게 받았어요. 20년 전이니까 2001년 즈음. 당시에는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었어요.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일한 거죠. 아이가 하교하기 전에 퇴근하는 게 좋았고, 방학에도 아이와 같이 쉬니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그게 유일한 좋은 점이었어요. 월급은 반찬값 정도였어요. 전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는데, 아이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어떤 친구는 춤도 춰주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았어요. 학생들이 졸업하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학교에 와요. 그러면 보고 싶었다고 급식실에도 오는 거예요. 자기들이 중학교에 가서 있었던 일들을 막 얘기하는 걸 듣는데, 월급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이 보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몸은 힘들었죠. 일주일에 4일을 병원에 다녔어요. 무릎 때문에 가기도 하고 손목 때문에 가기도 하고요. 제가 학교 급식 노동을 하면서 알게 된 한의원 단골이 되었는데, 하루는 딸아이랑 같이 침을 맞으러 갔거든요. 아이가 한의원에 다녀와서 막 우는 거예요. 엄마가 침을 맞는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았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침을 맞았으니까.

급식실 현장에 있는 대다수가 그래요. 급식이라는 일 자체가 단시간에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여덟 시에 출근을 해서 10–15분 아침 조회를 하고, 오전 열한 시 반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해요. 메뉴가 밥, 국, 샐러드, 돈가스, 누네띠네 이러면 간단해 보이지만, 돈가스가 나오면 돈가스만 튀기지 않아요. 소스가 있잖아요. 샐러드에도 야채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과일도 들어가고, 어떨 때는 쪼개진 식빵을 튀겨 넣어야 할 때도 있고, 두부를 튀겨 넣어야 할 때도 있어요. 누네띠네 생지가 오면 오븐에 넣고 구워야 하는데 오래된 오븐이란 말이에요. 열이 고르게 오르지 않아서 굽는 동안 계속 신경을 쓰고 판을 바꿔줘야 해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정이 있어요. 소스도 직접 만들어요. 과일소스라고 하면 과일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서 갈아서 만드는 거예요. 거의 모든 학교가 그럴 거예요.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번에 급식비가 늘었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 ‘아, 아이들이 잘 먹겠구나’ 생각되고, 질 높은 음식으로 양을 늘리면 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파인애플은 껍질 다 달린 게 들어와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주면 안 먹어요. 손이 많이 가니까요. 요즘에는 잘게 썰어서 일회용품으로 나오는 게 있어요. 그런 거 주면 또 잘 먹어요. 1차 손질이 되어 있는 식재료가 들어오면 되는데 그렇지 않죠. 메뉴의 가짓수를 늘려 일곱, 여덟 가지씩 나가는 거예요. 거의 양손 배식, 세 손 배식을 해야 하고요. 그러면 밥 위에 포도 주고, 김치 옆에 나물을 주는 식으로 담아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엄청 싫어해요. 그래서 먹지 않고 버리죠. 그러면서 잔반 처리 비용이 엄청 늘었어요.

이러다 보니 손가락 마디마디,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곳곳에 협착이 와요. 무거운 걸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웬만하면 같이 들어주려고 하는데 동시간대에 각자 너무 많은 일을 해내야 하다 보니 서로 마음만큼 신경을 써주기가 힘들죠. 그럼 그냥 무리가 가더라도 혼자 드는 거예요.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배식 시간으로 두 시간을 서 있어야 하고 다음이 청소인데, 청소가 더 큰 문제에요. 청소 기구들이 다 무거워요. 그러니까 아플 수밖에 없어요.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되면 손목이 아프다 그래요.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으로 뭘 집을 수가 없었어요. 저도 손에 염증이 생길 때가 있어요.

이런 염증들이 일상화되어 있고, 굉장히 열악해요. 사람들은 예전에 32만 원, 34만 원 받던 때가 있었으니 지금은 180만 원 정도면 많이 받는 게 아니냐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방학 때 급여가 안 나와요. 7–8월에는 15일 정도 근무할 수 있다고 해도 15일은 비어있으니 반밖에 벌지 못하고, 1월엔 심지어 월급이 하나도 안 나와요. 그런데 상시 근무를 하고 싶다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예요. 저는 일한 지 20년 정도 되었으니 방학 중에도 근속 수당이 몇십만 원 나온다고 해도, 1년 차 이런 분들은 근속 수당이 없으니 방학 중에는 급여가 아예 없어서 너무 힘든 거예요. 5일, 7일 일한 돈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1년 중 3개월 정도가 급여가 없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급여를 못 받는 월을 치면 한 달에 150만 원 정도 될 거예요. 그런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월급을 200만 원 정도 받으니까 쉬운 보직이다, 이러면서 댓글을 달아요. 못 살겠다고 하면 이기적인 거라고 그러고, 교육청에서도 너희는 정규직 아니냐고 하고요. 그런 반응을 보면 네가 한번 해봐라 할 수 있겠니 그런 생각이 들죠. 급식 노동하시면서 동시에 아르바이트하는 분이 많아요. 식당 아르바이트도 하고. 저도 예전에 엑스포장에서 여름방학에 열흘 일을 했어요. 그러면 학교에서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줘요. 열두 시간씩 딱 열흘 했는데 학교에서 한 달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이 받았어요. 학교에 계신 분 중에는 주말에 예식장 일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따로 알바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죠. 혼자 아이를 키운다든지 하면… 방학에는 급여가 안 되니까요. 이렇게 현장은 전쟁인데, 온라인 댓글 보면 우호적이지 않아서 속상할 때가 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모두가 스스로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아요.

원래 우리처럼 일하다가 위생원(공무원)으로 특채처럼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대전에도 몇 분 계세요. 동일한 연수를 기준으로 그분들 급여랑 비교하면 제가 50%도 안 돼요. 월급 차이도 많이 나지만 퇴직금, 상여금도 다 차이가 있어요. 그분들이 일을 더 많이 하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급식실뿐만 아니라 학교 안 46%, 10명 중 4–5명이 비정규직이에요. 필요에 의해 써먹고 버리기 좋은 형태의 계약인 거예요. 가사 일이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고, 너네는 그냥 밥을 해야 해, 라고 생각하는 것, 여성의 노동이 너무 많이 폄하되는 게 속상해요.

10대, 20대 때 그리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저는 특출나게 똑똑하지도 않았고, 평범한 사람이라 큰 꿈을 갖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내 꿈이 뭐였지, 생각해 보니 제 꿈이 현모양처였더라고요. 나는 현모양처처럼 살았나?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현모양처가 되려고 되게 많이 노력하면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기는 꿈이었는데 그 웃기는 꿈을 잊지 못하고 살고 있었구나. 내 속에 그게 계속 있었구나. 신랑이 밥 늦게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하길래 있던 밥을 주려고 하면, ‘난 따뜻한 밥 먹어야 해’ 하던 사람이거든요. 신랑은 항상 밖에서 밥을 안 먹고 들어왔어요.

노동조합 활동을 한 뒤로는 ‘네 밥은 네가 차려 먹어’ 하죠. 아이가 스무 살쯤 되어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내가 곱게 자란 줄 몰랐는데, 밥을 먹다 보니까 친구들이 되게 곱게 자랐다고 하더라.” 제가 아이들 생선 가시도 다 발라줬었거든요. 학교 일이 힘든 와중에도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그렇게 챙겼죠.

6–7년 전에 그 꿈을 버렸어요. 이제는 노동운동가로 좀 더 개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신랑한테 밥 직접 차려 먹으라고 했더니 한 달 동안 반항을 하더라고요. 밥을 안 먹겠다고. 그래서 제가 감사하다고 했죠, 설거지할 일도 없으니. 제가 그전에는 신랑이 라면 끓여 먹는 것도 되게 싫어했었거든요. 저한테 반항한답시고 ‘나 라면 끓여 먹을 거야’ 하더라고요. 고맙다고 했죠. 이제는 본인 스스로 밥도 해 먹어요. 밥이랑 분리수거만 하고 나머지를 안 하긴 하지만요. 본인은 가사일이 너무 어렵대요. 전에는 제 눈에 안 차서 설거지해놔도 제가 다시 닦고 했었거든요. 이제는 하게 두려고 참아요. 조금씩 변하게 하려고요. 가정에서 여성 노동을 너무 경시하다 보니 사회에서도 여성 노동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 다른 게 없잖아요. 싼 가격에 사람 부려 먹자는 거지. 저는 이제 그 의도를 이제 아니까요.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대전지부 농성 천막
비판적인 관점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노조에서 현대사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 여성 노동에 관해 공부한 적이 있어요. 선진국에서 여성 노동을 폄하했던 역사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때 ‘맞아, 우리 엄마도 그랬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이 우습게 여겨지는 사회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일반 회사에 남자와 똑같은 기준을 채워 입사해도 여자는 한계가 있어, 라고 하잖아요. 그 한계 누가 만들어냈는데? 지금은 깨달았으니, 바뀌어야겠죠. 현대사 공부를 하고, 그런 책을 접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기르게 되었어요. 그리고 내가 노동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심이 잡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경기도 급식노조의 한 노동자가 폐암에 걸렸어요. 확인을 해보니 급식실에 환풍이 안 되고 있던 거예요. 보여주기식으로 껍데기만 있고 기능을 안 하는 상태였던 거죠. 그 학교에서 같이 일하셨던 세 분이 폐암에 걸리셨고 그중 한 분은 돌아가셨어요. 나머지는 학교에 산재 신청을 해둔 상태예요. 폐암 진단받기 1년 전부터 학교에 계속 후드가 작동을 안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대요. 그러면 학교는 계속 돈이 없다고 하는 거죠. 그렇게 1년이 지났어요. 우리한테 쓸 돈이 없다 이거죠.

폐암 산재 신청하신 분이 전국에 약 마흔 분 이상 계세요. 대전에만 두 분 있고요. 그 외 질병, 유방암 같은 것도 앞으로 조사가 필요하고요. 학교 현장 조사를 나가서 휴지를 환풍구에 대보니 휴지가 흔들리지도 않더래요. 그동안 환기 시설에 대한 규제가 없었어요. 언론 매체와 같이 대대적으로 조명하면서 이번에 국정감사 때도 답변이 나오게 됐죠. 급식실 환경 개선을 위해 예산을 쓰겠다고 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쓰일지는 두고 봐야죠.

사람들은 급식 노동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파업해 보면 알아요. 급식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학교 급식이 사회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급식 파업을 하면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들 점심을 걱정해야 하잖아요.
학원 강의실 내부 교사 자리
선생님이 이 급식 한 판을 한 끼로 먹는다고 할 때 얼마를 지불하고 싶으세요?
9000원 이상이요. 좋은 재료를 사용하거든요. 야채도 저농약 유기농을 쓰고, 국물 낼 때도 조미료 안 넣어요. 국물을 내는 거의 모든 재료로 국내산을 써요. 간장도 혼합간장 안 쓰고. 과일도 저농약 유기농이고요. 그런데도 대량 음식이기 때문에 단가를 낮췄어요.

실제 급식비는 4000–5000원인데, 그 정도로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노동자들의 인건비를 빼기 때문이에요. 급식노동자의 경우 다른 교직 공무원들처럼 식사 시간을 보장받고 먹을 수 없거든요. 식사하다가도 누군가 오면 배식을 해주고 와서 다시 먹어요. 우리는 급식비를 낼 수 없다, 최소한 우리가 요리한 노동에 대한 비용은 빼야 한다, 요구해서 현재 재료비만 급식비로 내고 있어요.
근무하던 학교에서 몇 사람이 몇 인분을 준비했나요?
420인분을 네 명이 준비했어요. 400명 기준 밥이 다섯 솥이에요.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1800인분을 열 명이 준비해요. 구간이 많은 곳은 근로자를 더 늘려야 하잖아요. 그 상한선을 정해놨어요. 조리 실무사들의 배치 기준 상한선을 열 명으로 두고 있는데 아무리 재량으로 더 쓸 수 있다고 적혀있다고 해도 어느 학교가 조리 실무사를 더 쓰겠냐고요.

우리는 병가 낸 사람이 많아요. 학교 현장에는 병가나 산재가 많이 일어나서 기간제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사용자인 교육청과 관리자인 학교는 대체 인력을 구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옆의 동료가 힘들어질 것을 걱정해서 참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산재 위험에 노출되고 있어요. 현장이 너무 참혹하다 보니 노동조합에서 대체를 구해주게 되었어요. 이런 경우들을 교육청과 학교가 이용하고 있는 거죠. 화나고 속상해요. 우리의 근무 환경을 위해서 더 많이 더 강하게 싸워야 해요.
여성의 노동 가치가 늘 폄하되어왔다고 말씀하셨어요.
급식 노동으로 한 달에 얼마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한 달에 400만 원은 받아야 하지요. 연봉 5천은 되어야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급식실 노동자들이 급식실에서 일하는 풍경